[주간동아]
독일 유학시절 때 일이다. 내가 속한 대학연구소와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세계적인 학자들을 정기적으로 초청해 공동으로 콜로키엄을 열었다. 초청학자 안내 실무를 맡았던 나는 세계적인 학자들 가운데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유대인에 대해 숱하게 들어온 이야기를 직접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수천 년 동안 흩어져 살았음에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계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을 지속적으로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혼까지도 휴식이 필요” 탈무드에서도 역설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라 한다면 지나치게 게으른 대답이다. 그것은 유대인 특유의 교육방식 때문이다. 세대를 이어 전수되는 교육방식과 문화적 전통이 유대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교육방식이기에 유대인을 그토록 ‘다른 사람’들로 만드는 것일까.
유대인의 노동관은 근면과 성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휴식에 관한 명확한 철학이 유대인 노동관(觀)의 핵심이다. 유대인의 노동은 안식일을 정확히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주일을 일했으면 안식일에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 환자도 고쳐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기고 안식일에 환자를 고친 예수는 유대인에게 배척당했다. 6년을 일했으면 7년째는 안식년으로 쉬어야 한다. 경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경작하지 않은 땅에서 자연스럽게 난 과실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안식년만 있었던 게 아니다. 7년씩 7번을 지나고 50년째 되는 해는 ‘희년(year of jubilee)’이라 했다. 희년에는 인간의 모든 관습도 쉬어야 했다. 죄인들은 풀어줘야 했고, 모든 계약관계는 무효가 되어 새로 시작돼야 했다.
유대인의 노동관이 이처럼 휴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다른 민족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창의적 민족이 될 수 있었다. 하루의 휴식에 관해 ‘탈무드’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까지도 휴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잠을 자는 것이다.”
잔업이 일상화된 일본에서 야근은 근면 성실한 직원의 특권으로 여겨진다. 하네다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들어가는 모노레일을 타고 가다 보면 한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고층빌딩 사무실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최근 이런 일본의 ‘잔업문화’가 오히려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내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에는 산업사회의 노동방식으로는 21세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내용의 특집기사가 7월 말부터 몇 차례에 걸쳐 연재됐다. 서구기업에서 강조하는 ‘일과 삶의 조화(work-life balance)’ 정책에 앞서 일본에서는 ‘일과 생명의 조화’ 정책부터 실시해야 한다는 시니컬한 비평도 나왔다. 휴식을 통한 창의적 노동에 앞서 잔업을 없애 생명부터 부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의 노동문화를 흉내낼 수밖에 없었던 한국에서도 쉬지 않고 가동되는 공장과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은 압축성장의 상징이었다. 그 압축성장의 핵심 인재들이 이제 각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됐다. 이들의 눈에는 밥 먹듯 야근하는 직원들이 여전히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일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을 판단하게 돼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능력 있고 창의적인 직원들은 무모한 노동만 강요하는 직장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에서 11개 기업을 대상으로 ‘직장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11개 기업 가운데 7개 기업에서 ‘일과 삶의 균형’이 급여, 고용안정, 승진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것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일할 때 일하고 졸릴 때 자는,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회사에 꼭 필요한 우수 인재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인사담당자의 한숨은 깊어진다. 놓치고 싶지 않은 인재는 떠나고, 그저 참고 인내할 뿐인 직원만 남아 있는 회사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집단자살 ‘레밍’의 운명 남의 일? 천만의 말씀
한 가지 더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최근 들어 야근을 많이 하는 직종이 바뀌고 있다. 단순직종보다 전문직의 야근과 주말근무가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이다. 지식기반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할 방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단순직무의 경우 생산성의 확인은 매우 간명하다. 노동시간에 상응하는 제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노동의 가치는 노동시간에 상응하지도 않고, 단시간 내에 생산성이 확인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단순 육체노동으로 여겨왔던 일의 대부분이 지식노동의 형태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증명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식노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가치는 단순한 육체노동 방식으로 증명하려 한다. 바로 야근과 주말근무다.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은 오늘도 야근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식노동자에게 휴식과 수면의 박탈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아주 깊이 잠들어 있을 때를 ‘렘(REM)’이라 한다. 급속안구운동(rapid eye movement)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깊은 수면단계지만 눈동자가 의식이 있을 때처럼 급속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뇌 과학자들은 렘 수면 단계에서 우리의 단기기억장치에 저장된 자료들이 장기기억장치로 전환된다고 주장한다. 마치 컴퓨터의 램(RAM)과 하드디스크의 관계처럼 말이다. 중앙정보처리장치(CPU)에서 처리된 자료를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두듯, 잠을 자는 것은 낮에 일어난 모든 정보를 정리해 장기기억장치로 전환하는 기능을 한다. 잠을 자는 동안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정보와 버려야 할 정보를 분류하는 과정도 일어난다고 한다.
결국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21세기 경쟁력은 억지로 잠을 줄여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즐기는 재미와 행복에서 나온다. 미국 존스 홉킨스 의대의 존 가트너 교수는 “가벼운 조증(Hypomania), 즉 재미있어서 약간 흥분한 상태의 지속이 21세기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클린턴 같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
‘레밍’이라 불리는 스칸디나비아의 쥐들은 정기적으로 집단자살을 한다. 앞서가는 쥐가 절벽으로 떨어지면 뒤따라가는 쥐들이 그저 앞의 쥐를 따라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의 방식을 따르며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 즉 야근, 주말근무 같은 산업사회의 낡은 유산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며 재미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레밍의 운명은 남의 일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이다. 미친 짓이라는 말이다.
김정운 명지대학교 대학원 여가경영학과 교수 cwkim@mju.ac.kr